(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우리는 한국의 말과 글, 문화를 배우고 싶습니다. 1세대가 그렇게 가보고 싶은 고국에 우리는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국적을 찾고 싶습니다. 우리 조상은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미주 대륙에 한국 문화를 알리겠다고 지인과 함께 의기투합해 `국제문화연합회'를 만든 재미동포 이메리(73·여) 회장은 2006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시를 방문했을 때 한인 후손들로부터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한인들이 `3가지 소망이 있으니 꼭 좀 들어달라'고 부탁하며 꺼낸 이야기 때문에 이 회장은 먹먹해진 가슴을 치면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이들은 1905년 멕시코로 건너가 유카탄 반도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일했던 한인 1천33명의 후손으로 이른바 '애니깽'으로 불린다.
이 회장은 이주 역사 100년이 넘으면서 얼굴 생김새와 말투는 현지인과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한민족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새기면서 고국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을 털어놓던 그들의 눈망울을 잊지 못했다. 그는 사비를 털고 독지가들을 모아 애니깽을 돕기로 결심했다.
일일 바자와 식당을 열어 기금을 조성한 그는 틈만 나면 LA에서 자동차로 2시간 달리면 나오는 멕시코 티후아나 시를 찾았다. 이곳에는 3천여명의 애니깽이 살고 있다. 멕시코 전역에는 3만여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어, 한국 문화와 역사, 김치와 고추장 담그기, 전통 한식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3·1 운동과 8·15 광복절의 역사적 의미를 알려주고자 매년 기념식을 함께 열어줬다. 태극기와 무궁화를 그리고 민요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등 고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줬다.
"처음에 3·1절이 뭔지, 8·15가 뭔지도 몰랐어요. 또 추석에는 무엇을 하고, 설에는 왜 색동저고리를 입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찾아가서 조금씩 알려주면서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국제문화연합회는 티후아나에 머물지 않고 멕시코 한인후손회가 결성된 메리다와 멕시코시티 등 6개 도시로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생긴 이 회장은 2010년 비영리단체인 사단법인 에네켄한인후손후원재단을 창립하고 사무총장을 맡았다.
재단이 만들어지면서 형편이 나아지자 그해 가을 여러 기관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티후아나 소망 한국학교'를 가장 먼저 세웠다. 말과 글을 배우고 싶다는 애니깽들의 호소가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재단은 또 그해 65주년 광복절 행사 때 재미동포와 후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기념식을 처음으로 개최했다.
생활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후손 88쌍의 무료 결혼식을 열어준 것은 물론 한국의 지자체나 기관 등과 한인후손회 간 자매결연을 추진해 왕래할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회장은 애니깽의 존재를 한국에 알리고 이들이 한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최근 방한했다.
그는 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 내내 `애니깽'이라는 말을 백 번도 넘게 썼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절절한 마음을 담아 호소했다. `애니깽 후손 돕기 한국지부'를 결성하고 이를 통해 후원금은 물론 한복, 중고 노트북 컴퓨터, 사물놀이 악기 등을 모으겠다는 계획이다.
이 회장은 "애니깽 후손들이 한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문화 개념으로 한국의 영토를 중남미까지 넓히는 일"이라며 "그들이 당당하게 세계의 일원으로 살 수 있도록 모국이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거듭 부탁했다.
이 회장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사범대와 고신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1983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떠났다.
애니깽 돕기와 함께 버지니아공대 총기사건으로 실추된 한국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하버드대와 MIT 캠퍼스 등지에서 한국문화 시연과 세미나를 10회 이상 열었다. 한국 입양인 가족 초청 문화체험 행사와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오찬 등도 매년 개최했다. 이 공로로 지난해 미 대통령 봉사상 단체상과 개인상을 받았다.
(사)에네켄한인후손후원재단 이메리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