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꾼, 메리다, 유까딴반도

멕시코 이주 100주년 동아일보기사 전문 (2005년 1월)

몬테 왕언니 2014. 5. 31. 10:05

[멕시코 이주 100주년]<1>노예 이민의 굴레
《미국 하와이 이민이 시작(1902년 12월)된 지 약 2년 만인 1905년 4월 4일. 제물포항을 떠난 한인 1033명은 영국 상선 일포드 호에 몸을 싣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묵서가(墨西哥)’로 불리던 생소한 땅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 농장에 4년간 계약노동 형태로 고용된 이들은 온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가시에 찔려 가며 고통스러운 작업을 했다. 이민자들은 애니깽 농장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멕시코 유카탄 농장주협회에서 파견한 대리인 존 마이어스(영국인)가 대륙식민합자회사 서울지부를 통해 모집한 사람들이었다. 착취에 가까운 낮은 임금으로 돈도 벌지 못한 데다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는 돌아갈 조국마저 사라진 이들은 멕시코의 다른 도시와 쿠바로 흘러갔다. 혼혈이 거듭되면서 2만∼3만 명으로 추정되는 한인 후손들은 그 존재마저 잊혀졌다. 본보는 잊혀진 멕시코 및 중남미 이민 100주년을 맞아 멕시코와 쿠바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는 특별기획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심한 멀미와 영양실조 속에서 40여 일간의 항해를 마친 ‘코레아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내린 멕시코 서남부 살리나크루스 항구.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이들을 맞이한 것은 숨 막히게 뜨거운 바람이었다.

 

 

갖고 온 짐은 모두 불살라졌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인들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열차와 화물선에 실려 또다시 이동해야 했다. 프로그레소 항을 거쳐 메리다 지역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하는 환영 음악도 잠시, 유카탄 지역 농장주들은 한인들을 세워놓고 노예 경매와 같은 절차를 거쳤다.

 

 

건강한 노동자를 선점하기 위해 한인들의 입을 벌려 이 상태를 살펴보는 농장주들의 거친 행동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이들의 마지막 체면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방영된 미국의 TV 시리즈 ‘뿌리’에서 아프리카 청년 ‘쿤타 킨테’가 영문도 모른 채 미 대륙의 경매시장에 끌려나왔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일부 농장주는 한인의 상투를 잘라냈다. 떨어져 내린 것은 상투였지만 잘려나간 것은 자존심과 인격이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이들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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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이민자의 농장생활=‘무초 칼로(너무 덥다).’ 한인들이 처음으로 배운 스페인어는 4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의 고통을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애니깽 자르는 일에 동원된 이들은 가시밭 속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현지 마야인들의 움직임을 곁눈질로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마체테(멕시코 칼) 사용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날카로운 애니깽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는 한인들에게 농장 관리원은 사정없이 채찍을 날렸다.

 

 

한인들은 애니깽 가시에 온몸을 긁히면서 하루 5000∼6000개의 애니깽 잎을 땄다. 그러나 하루 일당 1원 30전이라는 약속과 달리 35전도 못되는 돈을 받았다.

 

배당받은 농장 숙소인 파하(마야 원주민 집)는 돼지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한인들은 작업용 장갑을 만들어 사용했다. 능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야인은 물론 농장주들이 깜짝 놀랐다.

 

 

한인 3세인 텔마 리 박 씨(85·여)는 “이민 1세대는 농장 관리원들에게 매를 맞아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며 “농사일을 몰랐던 할아버지는 이곳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이 많았다”고 전했다. 한인들의 비참한 처지는 1905년 중국인 허후이(河惠)의 편지가 황성신문에 실리면서 고국의 여론을 뒤흔들었다. 그는 “이곳 토인이 지구상 5, 6등의 노예라는 소리를 듣는데 한인은 그 밑인 7등 노예가 되어 영원히 우마(牛馬)와 같다”고 전했다.

 

고종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동포들을 빨리 송환하라고 명령했지만 윤치호(尹致昊) 외부협판(차관급)의 멕시코행은 일본의 방해로 좌절됐다. 대한제국은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허울뿐인 정부였다.

 

 

▽재이주에 나선 한인=1909년 5월 12일 4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난 뒤 마침내 자유가 찾아왔다. 멕시코 농장주와의 계약이 ‘부채 노예’ 성격을 띤 것이었지만 한인들의 타고난 성실성 덕분에 전대금을 갚은 뒤 모두 계약에서 풀려난 것.

 

그러나 계약노동이 끝나고 자유를 얻은 뒤의 현실은 더욱 참담했다. 돌아갈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토르티야(옥수수 전병)에 소금만 쳐서 먹었던 한인들이지만 나라가 망해 버린 절망감을 이겨 낼 길이 없었다.

 

 

1910년 멕시코 혁명에 휘말렸던 이들에게 닥친 또 한번의 시련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불어온 1920년대의 불황. 인조섬유 발달로 애니깽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한인들은 또 다른 삶을 찾아 나서야 했다.

 

설탕 수요 폭증으로 경기가 좋았던 쿠바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땅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쿠바 이주자들에게 다시 한번 혹독한 시련을 안겼다. 1921년 3월 쿠바로 이주한 한인 288명은 때마침 공급과잉으로 국제 설탕가격이 20분의 1로 폭락하자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 다시 쿠바의 애니깽 농장에 매달려야 했다.

 

 

1920년대 멕시코에서 2년간 유학했던 김순민(金淳民) 씨는 당시 멕시코 이민자들의 비애를 두고 “팔려온 것을 비로소 안 동포들은 목을 놓고 땅을 치며 이것이 국가의 죄냐, 사회의 죄냐, 또는 나의 죄냐, 그렇지 않으면 운명이냐 하고 울고 불기를 마지아니했다”고 전했다.(본보 1922년 8월 5일자 3면)

 

 

급격한 혼혈로 모국어를 잊고 민족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한인 후손들. 이제 이민 6세대까지 이른 한인 후손들은 ‘메히카노(멕시코인)’로 중남미 대륙 속에 빨려 들어갔다.

 

메리다 시에 거주하는 한인 2세 고흥찬(아마도 코로나 김·88) 씨는 절망 속에서 술기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희민 씨의 한 많은 인생을 기억했다.

 

“‘레반타바 엘 디네로 콘 팔라(삽으로 돈을 퍼 들인다).’ 이 말을 믿고 멕시코에 왔던 아버지는 고된 노동과 절망 속에서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것은 이곳 한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메리다=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애니깽▼

 

애니깽(Henequen)은 건조한 기후에 강한 용설란의 일종. 한인들은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가 있는 길이 1∼2m의 애니깽을 ‘어저귀’라고 불렀다. 초록색 잎의 껍질을 벗겨낼 때 나오는 강하고 탄력 있는 섬유질로 선박용 로프와 그물침대인 ‘아마카’를 만든다. 20년이 돼서야 꽃을 피우며, 꽃이 핀 뒤에는 수확을 하지 못한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른 선박 화물 운송량 증가로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필리핀 마닐라 삼과 함께 세계 로프시장을 양분했지만 인조섬유가 개발되자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멕시코 이주 100주년]<2>한인후손의 빛과 그늘

 
“언젠가는 내 힘으로 유카탄에서 제일 큰 공장을 만들어 운영할 거야….”

 

멕시코 유카탄 주 메리다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3세 율리세스 박 씨(64)는 어린 시절부터 목표가 확실했다.

 

그는 지금 유카탄 주에서 유일한 자동차 매연검사소를 운영하는 지역 유지다. 현지인들조차 스스럼없이 “율리세스가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율리세스 씨 집안의 성공=율리세스 씨 집안의 멕시코 정착 역사는 한국에서 옷 장사를 했던 할아버지(박승준·안토니오 박 김)가 희망과 기대 속에서 이민 길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메리다의 집 앞에 선 율리세스 박씨. 항상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살고 있다는 그는 한인 후손들이 애니깽 작업을 했던 조상들의 생활은 물론이고, 한인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고 지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할아버지는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을 잘랐고, 아버지(박정균·크레센시오 박 로페스·85)는 산에 올라가 껌의 원료인 치클액을 짜냈다.

 

멕시코 땅에 발을 디딘 지 4년 만인 1909년 5월 계약노동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지만, 마땅히 다른 일거리도 없었기 때문에 다시 애니깽 농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성공의 전기가 마련된 것은 율리세스 씨가 스무 살쯤 되던 1960년대.

 

율리세스 씨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머리와 남다른 손재주를 활용해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냄비 때우는 일부터 시작한 아버지는 우유저장용 알루미늄 용기 제작에 손을 댔다. 이후 현지 주민들의 반응이 좋자 아예 공장을 차려 대량생산에 나섰다. 아버지의 공장은 주방용품 제작 공장으로 커졌고, 지금도 메리다 지역에서 유일하게 알루미늄 용접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율리세스 씨의 홀로서기=율리세스 씨는 한 걸음 더 나갔다. 형제들과 함께 10여 년간 아버지 일을 도왔던 그는 “내 자신만의 삶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외국 상품 수입 및 건축자재, 자동차 부품 판매를 시작했다.

 

그는 1982년 또 한번 변신을 시도했다. 자식들에게 사업을 맡긴 뒤 멕시코시티 시청에서 농업개혁담당국장으로 일했다. 유카탄에서 알고 지내던 정부 관리가 시청으로 옮겨가면서 그를 추천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유카탄의 사업을 망치는 바람에 3년 임기의 절반만 채우고 다시 메리다로 돌아와야 했다.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유카탄 주 정부가 자동차 매연검사를 의무화하자 그는 즉각 매연검사소를 설립했다. 총 4개 업체가 주 정부의 허가를 받았지만, 나머지 업체는 모두 실패했고 그가 설립한 검사소만 성공했다. 현재 그가 운영하는 매연검사소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매달 약 15만 페소(약 1400만 원). 그는 사업에 성공한 배경을 “정직하게 일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율리세스 씨가 한인의 후예임을 당당히 내세우며 지역 유지로 성공한 데는 외가의 영향도 컸다. 양반 출신인 외증조부 이종오(李鍾旿·마누엘 리·1869∼1946)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창립(1909년 5월)한 한인사회 지도자로 1917년 12월 메리다 지역을 방문한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함께 멕시코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다른 후예들=메리다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한인 후손 뿌리찾기 운동을 벌이는 조남환 목사는 “이민 생활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 여부가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라고 말했다.

 

하지만 율리세스 씨와 몇몇 인사를 제외한 상당수는 자신이 한인의 후손인지조차 모른 채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인 2세인 펠리페 가르시아 루고 씨(72)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메리다 첸체 농장에서 농장주의 말을 관리했던 그는 평생 청소부로 일했다.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처럼 살지는 말라”고 당부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27세 때부터 메리다 공항에서 16년간 청소부로 일했으며 일거리를 찾다가 조그만 어선의 주방에서 일하기도 했다.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4년간 어선을 탔다. 그리고 다시 청소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메리다 외곽 지역의 한인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율리세스 씨는 “메리다 시내에 살고 있는 한인 후예들은 부모들이 고생하면서도 어렵사리 교육을 시킨 경우가 많지만 아직도 시골에서는 농민으로 어렵게 사는 한인들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메리다=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최고령 100세 고흥룡씨 인터뷰▼

 

멕시코 이주 한인 역사의 산증인인 고흥룡 옹. 어머니가 남긴 성경책을 읽으며 한글을 익힌 그는 우리말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한인 후예다.메리다=김영식 기자

 

“한국에는 가시밭 없죠? 여기엔 가시밭이 많아요.”

 

한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메리다 농장에 도착한 지 석 달 뒤인 1905년 8월에 태어나 올해 100세인 고흥룡(高興龍·아순시온 코로나 김) 옹은 유일하게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한인 2세대.

 

고 옹이 기억하는 멕시코 이민 1세대는 대부분 농장 관리원의 채찍을 맞고 살았던 한(恨) 많은 삶이었다.

 

그는 “한인들은 농장에서 풀을 치며(애니깽을 자르며) 살았지만 잘 먹지 못해 고생했다”며 “한인들이 짚신 신고 가시밭에 풀을 치러 들어갔다가 발이 찔려 울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설명했다.

 

한인 1세대들이 이민 모집자들에게 속아서 멕시코로 팔려온 것을 기억하는 고 옹은 “한인들은 ‘짐생(짐승)’같이 살았다”며 “밥도 못 먹고 강냉이떡으로 끼니를 때우던 한인들은 이제 모두 죽고 나만 남았다”고 말했다.

 

한인 1세대가 만든 한글학교에서 주는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한글을 배웠다는 그는 어머니가 남겨놓은 성경을 뒤적이며 한글을 공부했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고 옹은 그러나 “한국말이 왜 그렇게 달라졌느냐”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고 옹의 1900년 대 초반 어법과 기자의 말투가 달랐기 때문이다.

 

고 옹의 집은 메리다 지역 한인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다. 한인 4, 5세대 젊은이들이 기초적인 한글을 배우는 곳도 고 옹의 집이다.

 

그는 현지에서 만난 부인 마리아 크루스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12명이나 낳았다. 멕시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자식들의 장래도 감안한 선택인 듯했다. 그는 “돼지처럼 자슥(자식)만 쑥쑥 빼서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spear@donga.com

 

▼이민자 1033명 분포▼

 

당시 한인 이민자의 수는 1033명이라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기록에 따라서는 1014명에서 1036명까지 다양하다.

 

이 중 제물포(인천)에 주재했던 일본 영사 가토 모토시가 대륙식민합자회사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1904년 4월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가 가장 신빙성이 높다. 그는 “1033명 가운데 남자가 702명이고 여자가 135명, 어린아이가 196명이었다”며 “독신은 196명, 나머지는 257 가족으로 구성됐다”고 기록했다.

 

이를 근거로 본다면 긴 항해 중 어른 2명과 어린이 1명이 사망했고, 1명이 태어났기 때문에 1031명이 메리다에 도착한 셈이다. 이들 가운데 수는 적지만 전직 관리와 양반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한글학교를 운영하며 멕시코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한제국 퇴직군인 200여 명이 포함됐다는 것. 군대 해산 이후 떠돌던 퇴직군인들이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녀 성비의 불균형은 급격한 혼혈로 이어졌다. 덕성여대 이종득(李鍾得·스페인어과) 교수는 “남성 기혼자들은 멕시코로 떠날 때 아내나 딸을 데려가길 꺼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계약기간을 마친 뒤 고국으로 돌아오려는 의지가 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멕시코 이주 100주년]<3>멕시코의 코레아노

 

 

 

멕시코 이주 초기, 한인들은 일제의 창씨개명 못지않은 설움을 겪어야 했다. 멕시코 농장주와 관리인들이 한국식 발음이 어렵다며 이름을 제멋대로 바꿔 불렀기 때문이다. 김 씨는 킹(King)으로, 고 씨는 코로나(Corona), 최 씨는 산체스(Shancez)로 성이 바뀌어 버렸다. 또 이 씨는 가르시아로, 양 씨는 야네스로, 허 씨는 히메네스로 돌변했다.

 

일본이 1939년 한국인의 창씨개명을 법제화해 강제적으로 시행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성을 빼앗긴 것.

 

멕시코시티의 한인문화원 임용위(任龍尉) 실장이 지난해 말 한인 멕시코 이주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대사관 강당에서 공연한 모노드라마 ‘굿나잇 코리아’의 주인공 오크만도 ‘억만’에서 바뀐 이름. 한국에 있을 때 ‘순사(경찰)’와 연관이 있었을 듯한 ‘오순사(Osunsa)’라는 성도 등장했다.

김인명(안드레스 김 히메네스) 씨는 관청에 돈을 내고 킹으로 바뀌었던 자신의 성을 원래대로 되찾기도 했다. 자신의 묘비명에는 정확한 한국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한인 2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 씨가 멕시코 프로그레소에서 일곱번이나 결혼한 끝에 얻은 아들 루이스 올센 리 씨의 가족. 왼쪽은 루이스의 아내 마리아 아길라 씨이고 오른쪽은 한글을 배우기 위해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던 딸 세이디씨.

 

이주 한인들은 1909년 5월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 농장주와의 노동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다.

 

▽프로그레소의 억척 여인=한인 2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 씨(1907∼1995)는 ‘경을 칠 혼혈아’라는 말을 듣고 살아야 했다. 한인 이민 생활 초기. 혼혈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한인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마야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허제호 씨는 베라크루스 지역으로 설탕을 팔러 다녔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고아처럼 지내던 마리아 씨는 한인 집에 수양딸로 들어가야 했다.

애니깽 농장 생활을 하며 우물물을 긷던 어린 시절. 자리를 뺏는 나이 많은 여자아이를 밀어서 우물에 빠뜨린 일 때문에 밤새 공동묘지에서 벌서야 했지만 그의 괄괄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15세에 결혼했던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해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 남편은 아내가 버젓이 있는데도 현지 여인을 집에 들였다. 두 번째 남편인 멕시코인은 성격이 괄괄한 아내가 무섭다며 도망갔다. 프로그레소 항에서 만난 노르웨이 선원은 그의 일곱 번째 남편이었다.

사납고 험했던 인생역정은 마리아 씨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마리아 씨는 노르웨이 선원 올센 씨와 만나 자녀를 낳은 뒤 치클을 캐고, 소젖을 짜는 등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보름 또는 달포 만에 돌아오는 남편이 준 돈과 자신이 모은 돈으로 산 중턱 땅 일부를 사서 개간해 야자수 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마리아 씨의 아들 루이스 올센 리 씨(54)는 “어머니는 여자 혼자의 힘으로 산을 개간한 대단한 분이었다”며 “당시 주위 사람들은 밤늦게 산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유령인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마리아 씨는 이렇게 번 돈으로 프로그레소 항에 별장을 짓고 택시를 구입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산 택시를 운영하면서 이젠 프로그레소 개인택시조합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말 멕시코시티 브리스톨 호텔에서 열린 한인후손 송년회에 참여한 멕시코 지역의 한인 후예들. 멕시코시티의 한인 후손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유대감을 이어가고 있다.

 

▽멕시코시티와 기타 지역의 한인=31세의 나이로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가족이민을 결행한 김익주(金益周·호아킨 김·1874∼1955) 선생은 한인 가운데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성공한 인사.

그는 애니깽 농장에서 계약노동이 끝난 뒤 탐피코 지역으로 이동해 냉차 가게와 식당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쿠바로 인삼을 팔러 다니기도 했던 그는 탐피코에서 국민회 지방회를 결성해 한인 회원등록 및 독립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나중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모두 팔아 독립자금으로 냈다.

특히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멕시코 탐피코 지방회 이름으로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송금했다. 또 3·1운동 기념행사, 순국선열기념식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보낸 뒤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어려운 삶을 살기도 했다.

그가 멕시코시티로 이주한 뒤 낳은 아들 안토니오 김 씨(69)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교육받았던 어린 시절 너무도 살기가 어려웠다”며 “마약과 도둑질 잡심부름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네 아이들이 ‘치니토(눈 찢어진 사람)’라며 동양인을 비하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코레아노”라며 싸웠다고 한다.

멕시코 이주 3세대로 넘어가면서 김 선생의 집안도 멕시코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멕시코 한인 후손회장을 맡고 있는 다비드 김 공 씨(66)는 안토니오 씨의 형인 프란시스코 씨의 큰아들. 회계사로 일하고 있는 다비드 씨는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동생 아벨 씨와 함께 멕시코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멕시코시티=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저임금 피같은 돈모아 독립운동 기부금 보내▼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 후예들은 지금도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치른다. 무더위와 애니깽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조국 광복을 염원한 조상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

 

한인들은 계약노동에서 풀려나기 직전인 1909년 5월 9일 재미 항일단체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했다. 멕시코 이주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14명이 창립회원이다.

 

재미 한인회가 불쌍한 처지에 있던 멕시코 한인의 미국 이민을 추진하다가 실패하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국민회 지방회는 이후 멕시코 각 지역으로 퍼져 국어 교육을 통해 민족 정체성 고취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인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구심점이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멕시코 한인들은 각지 국민회관을 중심으로 독립선언 경축식에 이어 시가행진을 벌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던 한인 1세대는 푼돈을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1주일에 기껏 2, 3달러를 벌었던 쿠바 한인들도 1937년부터 1945년 광복될 때까지 1489달러를 모아 송금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멕시코와 쿠바 한인사회는 항일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인 이주자 가운데 대한제국 광무군 출신의 퇴직군인 200여 명은 숭무주의(崇武主義)를 주창하며 1910년 11월 메리다에 숭무학교를 설립해 군사훈련을 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로 세워진 숭무학교에는 118명의 생도가 입학했으나 1913년 멕시코 혁명으로 폐교됐다.

 

 

▼노예이민? 개척이민? 여전히 논란거리▼

 

멕시코 한인 이주는 4년간의 계약노동이지만 빚을 갚지 못하면 농장에 얽매이는 ‘부채 노예’라는 특이한 농노 이민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를 두고 멕시코 메리다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는 조남환 목사는 멕시코 이민은 ‘노예 이민’이 아니라 ‘개척 이민’으로 새롭게 자리 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목사는 그 근거로 이들이 제물포항을 떠날 때 정부에서 여권을 받았고, 출국 목적도 ‘멕시코 농장근로’여서 정당한 절차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전국적인 이민 모집공고에 따라 이주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돈을 마련한 이주자 8명은 애니깽 농장에서 4년간의 계약이 만료되기 전 빚을 갚고 풀려났다. 이를 보더라도 노예이민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게 조 목사의 설명.

 

그러나 대한제국이 당시 계약노동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이민자의 상당수는 하와이로 가는 것으로 잘못 알고 배를 탔으며, 농부 모집공고를 내는 등의 사기행각도 있었기 때문에 정당한 절차로만 보기 어렵다는 관측도 여전히 있다.

 

[멕시코 이주 100주년]<4>쿠바혁명의 회오리
초창기 한인거주지
쿠바 마탄사스 지역의 핑카 엘 볼로 농장에서 애니깽을 잘랐던 한인들이 묵었던 거주지.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책을 쓴 마르타 임 김 씨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집필한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 말처럼 한인 이민자 ‘애니깽’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잘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  헤밍웨이는 글을 쓰기 위해 쿠바를 찾았지만, 멕시코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지칠 대로 지친 한인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카리브 해를 건넜다.》

 

 

스페인어를 배운 한인 1.5세들에 의지한 멕시코 한인 274명은 1921년 3월 11일 쿠바 마나티 항에 도착했다.

국적 문제로 17일간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나라 잃은 설움을 삼켜야 했던 것도 잠시, ‘일거리도 많고, 사탕수수 농장은 임금도 많이 준다’는 말을 믿고 쿠바에 도착한 한인들은 대부분 실업자로 전락하고 만다. 공급 과잉으로 국제 설탕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애니깽을 만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애니깽을 자르는 일뿐이었다.

 

 

한글학교에 모여
마탄사스 지역 핑카 엘 볼로 마을의 한글학교인 민성국어학교에 모인 쿠바의 한인. 마르타 임 김 씨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

 

 

핑카 엘 볼로 애니깽 농장에서 태어난 주하엽(세실리아 주 키아오·79·여) 씨는 “초기 농장생활을 했던 한인들은 ‘내일은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고 기억했다.

한인들은 공짜로 구할 수 있는 피마자 잎을 잘라 김치를 담갔다.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은 술에 의지하곤 했다.

이런 쿠바 한인들을 구원한 것은 높은 교육열이었다. 가난을 대물림할 수는 없었다.

 

한인회가 1922년 11월 4일 마탄사스 주 정부에 제출한 한인회 회계장부에는 교육에 대한 한인들의 집념이 담겨 있다. 1년간 지출한 회비 372페소 가운데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한 항목은 144페소에 이르는 ‘학교 지원비’. 반면에 사무실 임대료는 72페소, 전기료는 36페소, 기타 사업은 30페소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를 후원해 1997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임천택(任千澤) 선생은 쿠바 한인 가운데 ‘자식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례.

그의 장남 헤르니모 임 김(임은조·78) 씨는 한인 가운데 최초로 대학에 들어갔다. 아바나대 법대에 다니던 시절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그는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의 선봉에 선 주역의 하나였다.

현재의 핑카 엘 볼로 농장
쿠바로 이주한 한인들이 정착했던 마탄사스 지역의 핑카 엘 볼로 농장의 현재 모습. 이젠 애니깽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경찰관으로 출발한 그는 혁명정부 식량산업부에서 차관급에 올라 한인 출신으로는 최고위직에 진출했다. 마탄사스 종합대 철학과 교수로 일했던 마르타 씨(66·여)를 포함해 그의 동생 8명은 무상교육을 내세운 혁명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

 

뒤이어 다른 한인 후손들도 조금씩 대학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쿠바 한인 사회는 비교적 빨리 뿌리를 내리는 듯했지만 1959년의 쿠바 혁명으로 다시 한번 요동친다.

카스트로 혁명정부는 사유재산을 동결하거나 몰수했다. 천신만고 끝에 쿠바 사회의 중산층으로 성장한 한인 상인들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공산혁명 직후 부르주아로 몰린 일부 한인들은 재산을 빼앗기거나 멕시코, 중남미,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한인 사회도 갈라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카르데나스 애니깽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를 규합해 혁명에 앞장섰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그만 전투에서 반혁명군으로 참여한 한인도 있었다.

 

기념탑 부지 앞에서
쿠바 이주 한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마탄사스의 핑카 엘 볼로 농장 입구에는 한인 이주기념탑이 들어설 예정이다. 기념탑이 서게 될 부지 앞에 서 있는 헤르니모 임 김 씨. 마탄사스=김영식 기자

 

 

그러나 쿠바 혁명은 한편으로는 어렵게 살고 있던 한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한인 사회를 괴롭히던 외국인 배척주의와 차별 고용도 사라졌다. 무상교육과 무상배급 제도로 한인들은 쿠바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급속히 쿠바 사회로 동화됐다.

 

현재 750명 남짓한 쿠바 한인 가운데 의사만 16명에 이르고, 20여 명이 엔지니어로 활동한다. 변호사, 교수 등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는 인물도 수십 명에 이른다. 멕시코 한인들보다 낫다.

그렇다고 형편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한인뿐 아니라 쿠바의 현실이 그렇다.

차관급을 지내 한인 사회에서 가장 형편이 나은 임 씨의 가족은 매달 40달러(약 4만1000원) 남짓한 연금과 얼마 안 되는 배급 쌀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토마스 이 차(이호영·74) 씨도 쿠바 혁명군에 참여해 4년간 앙골라에 파견돼 공산혁명을 지원했지만 매달 6달러(약 6200원)에 불과한 연금이 전부다. 코흘리개 꼬마들이 집에서 만든 캔디를 팔아야 하는 지경이다.

1990년대 초 아바나에 북한 식당 ‘모란봉’이 문을 열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쿠바인들은 한국 음식을 먹지 않았고, 한인들은 한국 음식을 사먹을 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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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마탄사스=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쿠바의 한인회▼

 

현재 쿠바에 거주하는 한인 후손은 750여 명. 그러나 하나로 묶어 주는 한인회가 없다.

한인들은 1921년 6월 마탄사스에서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했고, 마탄사스 주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67년 한인회는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등록 회원 수대로 매년 내야 하는 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쿠바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는 헤르니모 임 김 씨는 “4년 전 정부에 한인회 재등록 신청을 냈지만 아직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 정부는 사적인 조직을 환영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임 씨는 조심스럽게 한인 후손들을 찾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한글을 잊은 후손들을 위해 스페인어로 한국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책을 얻고 싶다”며 “한글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쿠바의 北대사관▼

 

북한은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0년 8월 쿠바와 국교를 맺고 이듬해 4월 수도 아바나에 상주 대사관을 열었다.

아바나에 진출한 북한은 곧바로 한인사회와 접촉했다.

북한의 쿠바 방문단은 1961년 3월 국립은행 총재에 이어 공업장관을 지내던 체 게바라의 주선으로 쿠바 한인사회 지도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한인들은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한글로 된 잡지를 얻었다. 한글로 된 책을 구하지 못하던 이들에겐 좋은 교재였다.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아바나는 물론이고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의 한인 마을을 직접 방문했다. 당시는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경쟁이 치열하던 때였다. 쿠바 한인을 북한 지지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한인 가정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한인들이 보관하던 사진 속에서 태극기를 발견한 뒤 ‘반동’이라며 펄펄 뛰었다. 태극기를 본 당시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쿠바의 한인들이 남한 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소동은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착각 때문이었다. 한인들이 멕시코와 쿠바로 이주했던 1900년대 초반 태극기는 이미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태극기의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남한의 국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엉뚱한’ 반응을 나타낸 셈이다.

 


멕시코 이주 100주년]<5·끝>희망과 미래

 2005년은 한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 해군 순항훈련 함대가 당시 멕시코 이민 1세대의 항로를 따라 16일 첫 방문지인 남서부의 살리나크루스항에 기항했다. 1905년 4월 인천항을 떠난 한인 1033명은 1905년 5월 12일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한 뒤 유카탄 반도 에네켄 농장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키에네스(Quien es·누구냐).”“치노(Chino·중국인들 왔어).” 최근 멕시코 메리다 인근 지역의 한인 가정을 찾은 율리세스 박 메리다 한인후손회장(64)은 잠시 당황했다.

 

한인 5세대인 어린 소녀가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를 잠시 쳐다본 뒤 어머니에게 중국인이 찾아왔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뭔가 메울 수 없는 공백이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박 씨는 한인 후손들에게 정체성을 찾아주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지 다시 한번 절감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아라셀리 김 씨(31·여)는 코레아노의 긍지는 물론이고 메히카노(멕시코인)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한 한인 4세. 한국과 멕시코의 축구경기가 열린다면 누가 이겨도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한국부터 가르치고 싶다는 김 씨. 그렇지만 그 자신부터 한국을 모른다. 안타깝지만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일했던 선조들의 얘기도 잘 모른다.

한인 4, 5세대에 해당하는 신세대들은 굳이 한인이냐 멕시코인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두 그룹 모두에 속해 있다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문제는 한국을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도 쉽지 않다.

멕시코 한인이주 100주년을 맞아 애니깽 농장 역사탐방 행사장으로 사용될 메리다 지역의 사낙타 농장.

 

 

지난해 12월 중순 멕시코시티 브리스톨 호텔에서 열린 한인 후손회의 망년회. 기자도 후손들의 초청을 받았다.

 

한인 5세대인 비리비아나 김(18), 제니퍼 김 양(12) 자매에게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국과 관련된 정보나 얘기를 접해 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자가 “오늘 행사가 뭔지 아느냐”고 다시 묻자 자매는 “할아버지가 잔치가 있다고 해서 그냥 따라왔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멕시코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했던 황보영주(皇甫永周·후앙 푸·1895∼1959) 씨의 외손자 루돌프 김 김 씨(34)는 달랐다.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본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는 그는 그러나 부모 세대의 생활과 지금의 현실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산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일본 제품을 판다는 게 아이러니”라고 웃으면서도 “사업은 사업일 뿐”이라고 말했다.

 

 

쿠바 마탄사스 지역에 거주하는 토마스 호의 진갑 잔치 모습. 한복을 차려입고, 잔치상을 받는 모습이 한국에서의 잔치 분위기와 다르지 않다.

 

 

▽한인 사회의 미래=한국 국제교육진흥원 지원으로 한국에서 9개월간 한글교육을 받았던 세이디 올센 아길라 씨(23·여)는 “멕시코 친구들은 나를 보고 코레아노라고 하는데 한국에 갔더니 나를 외국인이라고 해서 서운했다”고 말했다. 멕시코 인과의 급속한 혼혈에 한국어까지 잊은 애니깽 후손들로서는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할 일인지 모른다.

다만 한국 음식문화는 여전히 한인 후손을 묶고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의 하나다. 애니깽 농장생활 초기에 고추 마늘 된장 간장을 구하지 못해 고생했던 한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에서 구한 재료로 김치를 담그고 장조림, 만두, 국수를 만들었다. 지금도 한인 후손들은 삼일절 등 기념일에 모여 한국 음식을 만든다.

 

유누엔 김 델라루스 씨(21·여)는 “한국말은 못하지만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며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한국 문화를 접하는 시간을 갖곤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2세대 한인 이민자들이 멕시코시티 두란고 지역에서 매주 토요일 운영하는 한글학교. 한인후손 어린이들도 이곳에서 한글 교육을 받고 있다.

 

오유키 오르테스 신 씨(24·여)는 자신이 한인 후예라는 사실이 즐겁다고 했다.

한국문화를 한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그는 메리다 지역의 최고령자 고흥룡(高興龍·아순시온 코로나 김·100) 옹이 한글을 쓰는 것을 보고 한글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고 옹의 집을 드나들던 그는 한글로 ‘내 이름은 오유키예요’라고 또박또박 써내려갈 정도가 됐다. 한국을 방문해 한국문화를 깊이 체험하는 것이 소원이다.

 

 

 

멕시코의 한인 후손들과 한국을 잇는 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16일 한국 해군 순항훈련 함대가 애니깽 이민선 일포드호가 처음 도착했던 멕시코 남서부 살리나크루스 항에 입항했을 때도 좋은 기회였다.

당시 이곳에 모였던 한인후손 200여 명은 한국에서 선박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제품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감격을 떨치지 못했다.

 

멕시코시티=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천세택 멕시코 한인 100주년 기념 후원회장 인터뷰▼

 

“한인 멕시코 이주 100주년 기념행사는 멕시코 한인들이 새롭게 일어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천세택(千世澤·53·사진) 멕시코 한인 이주 100주년기념사업 후원회장은 5월 멕시코시티에서 개최할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100년 전 ‘노예 이민’으로 출발한 한인의 후손들이 쓰라린 역사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급속한 혼혈로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한인 후손들에겐 이번 행사가 100년 뒤 한인사회의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동시에 멕시코인들이 한인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선입관을 씻어내고, 한인의 개척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천 회장은 강조했다.

그는 “멕시코의 한인들은 고국이 어려울 때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립 성금을 보내던 애국지사의 후손”이라며 “2005년을 새로운 한인 공동체 형성의 출발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촉구했다.

천 회장은 현재 한인 멕시코 이민사 정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인 이주자들이 초기에 겪었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후손들이 조상을 기억하고, 한인 후예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 한인 후손들의 고국 산업연수를 추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지붕 두가족된 멕시코 한인사회▼

 

한인들이 멕시코에 이주한 것은 1905년이지만 한국과 멕시코 정부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1962년까지 기나긴 공백기가 있었다.

 

외교관계 수립 5년 뒤인 1967년부터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우리 국민의 멕시코 이민이 이뤄졌지만,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국적을 가진 이민자는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애니깽 후손들은 이미 멕시코 현지화가 이뤄졌다. 새로 온 한국 국적 이민자들과는 생각이나 성격도 다르다. 두 이민사회가 하나로 뭉치기는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처리하려는 신규 이민자들과 달리 느긋하고 급할 것 없는 애니깽 후손들이 함께 뭉쳐 공동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도 쉽지 않다. 두 이민사회는 자연히 멀어졌다.

 

별다른 교류를 갖지 않던 두 이민사회는 그러나 한인 이주 10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만남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는 멕시코 한인회 사무실에 애니깽 후손회 사무실이 입주하면서 새로운 ‘공존의 실험’을 시작했다.

 

이광석 멕시코시티 한인회장은 “100주년 기념행사 하나만으로 두 이민사회가 하나로 되는 것은 아니다”며 “다만 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인 1만5000명과 애니깽 후손 3만여명이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갖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멕시코시티=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